핵폐기물을 둘러싼 굴곡진 역사

한국 반핵운동 역사 중 70% 이상은 핵폐기장 반대운동 역사일 정도로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우리 사회 갈등은 컸다. 더구나 200412, ·저준위 핵폐기장과 고준위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분리되기 전까지 한국의 핵폐기장은 중·저준위뿐만 아니라, 고준위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까지 처분하는 시설을 의미했다. 그간 있었던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통해 실패를 연속했던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을 살펴보자.

이헌석 편집위원(에너지정의행동)


 

1989년 최초의 계획 수립·추진영덕·울진·영일 지역

핵폐기장 건설을 위한 정부의 계획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당시 과학기술처는 핵폐기물 종합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방사성폐기물 특별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전국 89개 후보지를 1차 선정한 이후 이를 25개 후보지(동해안 15, ·서해안 10), 그리고 최종적으로 울진, 영덕, 영일 등 동해안 3개 지역이 선정됐다. 이들 지역은 198812월부터 시추조사 등 구체적인 조사가 진행 중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지역주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19892, 임시국회를 통해 이들 지역이 핵폐기장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역주민들의 거대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후보지 1순위 였던 영덕군의 반발은 매우 컸다. 군단위 집회는 물론, 면단위 집회에도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의 참가가 있었고, 국도 점거 투쟁을 비롯한 수위 높은 투쟁이 전개됐다.

결국 19893, 당시 사업주체이던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부지활동을 중단하고, 홍보활동을 전개했으나, 이 역시 쉽지 않아 그해 연말 활동을 중단하면서 정부의 계획은 백지화됐다. 이 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으로 기록된다.

본격적인 반핵운동의 시작, 안면도

 

 

 

그 후 정부는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분장과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만으로는 지역주민들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고 판단, 2원자력연구소 부지를 포함한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909월 제226차 원자력위원회는 제2원자력연구소를 태안군 고남면에 짓기로 하고, 19915월까지 중·저준위 핵폐기장 위치와 처분방식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지역주민들은 내용을 알 수 없었다.

1990113, 국내 조간신문에 일제히 핵폐기물 영구처분장 안면도 건설 계획기사가 보도되면서 지역주민들은 내용을 알게 됐고, 분노했다. 이후 지역주민들은 등교거부, 상가철시, 이장단 사표 제출 등 강력한 반대운동에 돌입. 신문보도 5일 동안 대규모 집회에 화염병과 휘발유통이 등장하고 안면지서장의 차와 안면지서가 불타는 등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 주민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 어떠한 원자력시설도 안면도에 추진하지 않겠다는 사실상 백지화 선언을 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안면도는 핵폐기장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정부는 단지 선정방식만 바꿨기 때문이다. 정부는 1991년 서울대 등에 연구용역을 발주하여 핵폐기장 부지선정을 위한 기준과 홍보전략, 적합지역 선정기준 등을 선정한 이후, 199112, 강원도 고성군, 양양군, 경북 울진, 영일, 전남 장흥, 충남 태안군 등 6개 지역을 다시 후보지로 선정했다. 다시 안면도를 비롯 6개지역의 반대운동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핵폐기장 유치운동에 앞장섰던 지역주민들이 1993년 원자력연구소로부터 돈을 지원받았다는 양심선언을 하면서 정부는 도덕적 타격을 입게 되고, 결국 이 계획은 모두 백지화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문제에 대한 홍보를 전담할 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정부는 19923, 일본원자력문화진흥재단을 본 딴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과학자들로 구성된 원자력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핵폐기장을 홍보하다보니 한계를 느낀 것이다. 이후 정부의 핵폐기장, 핵발전소 홍보는 TV와 라디오, 신문 등 더 다양한 매체로 확대되게 된다.

 

활성단층 발견으로 정부 스스로 포기한 굴업도

이후 영일군, 양산군, 울진군에서 핵폐기장 유치활동이 이어졌으나 큰 힘을 얻지 못한 채 유치활동은 점차 사그라졌다.

1994년 문민정부는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의 촉진 및 시설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방촉법)’을 제정하여 핵폐기장 건설지역의 지원을 법제화한다. 그 이전까지 구두로만 언급되던 지원내역을 법제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핵폐기장 건설 지역은 매년 최대 50억원, 운영기간 중 30년간 매년 최대 30억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지역선정 과정의 불투명함은 이전 계획과 달라지지 않았다. 19941215. MBC 뉴스데스크는 굴업도가 핵폐기장으로 유력하다는 특종보도를 했고, 이는 22일 과학기술처 장관의 최종 선정발표로 확정됐다.

당시 5가구 10명만 살고 있던 굴업도. 그동안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히 핵폐기장 건설에 실패했던 정부는 인구가 적은 도서지역을 찾았고, 이런 면에서 굴업도는 최선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엔 모()섬인 덕적도 주민들과 인천시민들이 나섰고,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이들의 활동은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 굴업도에서 터졌다. 199510, 핵폐기장 부지를 조사하던 한국자원연구소가 굴업도 반경 3km 구역에서 해저활성단층의 징후를 발견한 것이다. 이는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었다. 같은 해 11, 과학기술처는 정밀조사를 통해 최소 2개의 활성단층을 발견했고, 결국 12, 굴업도는 핵폐기장 후보지에서 완전히 해제된다.

굴업도 핵폐기장 선정 이후 정부는 이전과 달리 다양한 신문, 방송, 잡지를 통해 핵폐기장의 필요성과 안전성을 강조해왔다. 특히 굴업도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누구보다 앞장서서 광고를 해왔기에 굴업도 백지화의 충격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 후 정부는 지자체를 대상으로 핵폐기장 유치 공모를 추진하기는 했으나, 지역주민들의 반대와 지자체의 참여저조로 이들 계획은 모두 제대로 추진조차 못해보고 끝났다. 그리고 그 흐름은 2003년 부안으로 이어진다.

 

 

2003년 부안에서 이명박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까지는 다음호에 이어짐

발행일 : 20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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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