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정책과 공론화

 

이영희(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박근혜 정부는 국정과제로 올초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발족과 임기 내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부지 선정과 착공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정부계획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탈핵운동내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된 바 있다. 탈핵신문은 사용후 핵연료 공론화에 있어서 해외사례를 3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영국 사례, 2회는 캐나다, 3회는 독일사례이다.

 

 

영국정부 핵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 1997년 주민 저항으로 전면 백지화

영국은 세계 최초로 상업용 핵발전을 시작한 나라로 현재 16기의 핵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다. 영국의 핵폐기물 관리정책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1990년대 말부터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중시하는 보다 참여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다.

영국 정부는 1980년대부터 핵폐기물 처분장 부지선정에 박차를 가하였지만 강력한 주민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1997년 셀라필드에서 핵폐기물 처분장 부지 확보 시도가 역시 주민 반발로 실패로 끝나자 결국 기존의 핵폐기물 처분장 관련 정책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1997년에 공표하게 된다. 곧이어 정부는 향후 영국의 핵폐기물 정책이 국민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핵폐기물 관리 정책의 초반 단계부터 일반시민과 이해관계자들을 가급적 많이 참여시키겠으며, 이를 주관할 권위 있는 독립적 기구를 곧 설립하겠다고 선언하였다.

 

 

2003년 핵폐기물 관리정책 초기부터, 일반시민·이해관계자가 참여한 독립기구 설립 운영

이에 따라 200311월에 새롭게 설립된 기관이 바로 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CoRWM)였다. CoRWM은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독립되어 있는 기구로서, 공개 모집 과정을 거쳐 선발된 13명의 위원들(사회과학자, 환경단체 인사, 기술적 전문가 등)로 구성되었다.

CoRWM은 인간과 환경을 보호하면서 영국 내 핵폐기물(주로 고준위)을 장기적으로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사회적 공론화 절차를 거쳐 마련하여 20067월까지 정부에 권고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CoRWM은 공개성, 투명성, 공익성, 공평성, 참여 극대화 등의 원칙을 설정하고 먼저 준비 단계에서 핵폐기물에 대한 장기적 관리(처분 포함)위한 모든 가능한 대안을 다 고려한 다음, 대안목록들과 평가기준들에 대한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사회적 공론화 절차를 단계별로 실행하였다. 구체적으로 대중 및 이해관계자 참여(PSE) 프로그램은 다음 세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PSE1단계(200411~20051)의 목적은 핵폐기물 관리정책에 대한 CoRWM의 사전 조사결과에 대한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통해 CoRWM이 다음 단계에서 관리 정책 대안목록들을 좁혀나가는 데 도움을 받는 데 있었다. 이때 활용된 PSE 방법들은 전국 이해관계자포럼(다양한 조직을 대표하는 18의 이해관계자들이 이틀 동안 계속된 포럼을 통해 CoRWM이 제기한 질문들을 숙고하고 응답), 핵발전소 지역 라운드 테이블(핵발전소를 유치하고 있던 지역들에서 개최된 회의로, 전국적 및 지역적 이해관계자들 총 95명이 참여), 공개 미팅(핵발전소 인근 지역에서 8차례 개최되어 111명이 참가. 미팅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됨), 토론 집단(원자자력발전소와 관계없는 지역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 총 63명으로 구성된 8개의 토론 집단이 개최), 문서화된 자료를 통한 자문(폐기물 관리 정책과 관련된 문서를 작성한 다음 CoRWM의 작업에 관심을 보인 약 4천명의 사람들에게 우송하여 153명으로부터 반응을 얻음) 등이었다.

PSE2단계(20054~20056)에서는 PSE 1단계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압축된 폐기물 관리 대안목록(short-list) CoRWM이 제안한 평가 절차를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이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에 기반하여 CoRWM장기중간저장, 심지층처분, 단계적 심지층처분, 천층처분이라는 네 개의 핵폐기물 관리 대안목록들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PSE3단계(200510~20062)에서는 대중 및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통해 핵폐기물 관리 대안목록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단계에서도 전 단계와 마찬가지로 시민패널 4, 전국이해관계자포럼 1, 핵발전소 지역 이해관계자 라운드 테이블 8회 등의 사회적 공론화 절차가 실행되었다.

이어서 PSE의 마지막 단계인 4단계(20064~20067)에서는 핵폐기물 관리 정책에 대한 CoRWM의 권고안 초안에 대한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의 코멘트를 구하고 최종 권고안을 운영위원 11인의 만장일치로 확정한 다음 이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최종 권고안의 핵심 내용은, 장기적으로 방사성폐기물은 땅 속 깊이 처분하는 지층처분(geological disposal)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적절한 최종 처분시설 건설까지는 수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견고한 중간저장 프로그램이 방사성폐기물 장기관리 전략의 핵심적 부분이 되어야 한다, 정부와 잠재적인 시설 유치 지역들(이들은 자발적 참여 의지를 지녀야 한다) 사이에는 대등한 파트너십이 형성되어야 한다, 부지선정 실행과정을 감독할 독립적 기관이 즉각 설립되어야 한다, 등의 내용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2년 이상 5천명의 일반시민들 참여과정을 거쳐 도출

CoRWM의 권고안에 대해 영국 정부와 의회는 즉각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처럼 영국 정부와 의회가 한결같이 CoRWM의 권고안 수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무엇보다도 CoRWM의 권고안이 몇몇 전문가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 및 이해관계자들의 참여 과정을 거쳐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PSE 프로그램이 그 전에 활용되었던 대중 참여 프로그램들과 가장 다른 점은 첫째, PSE에서는 대중과 이해관계자들로 하여금 의사결정 과정상의 매우 이른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고, 둘째, 구체적인 의사결정 단계에서는 정교한 사회과학적 기법들을 활용하여 일반 대중의 의견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균형 있게 통합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CoRWMPSE 프로그램은 2 7개월 동안 약 5,000명 정도의 일반시민과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영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이고 야심적인 참여적 공공정책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에서의 우려와는 달리 일반 시민들도 핵폐기물 문제와 같은 과학기술적 이슈에 대한 논의과정에도 충분히 참여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기존의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던 핵폐기물 관리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참여적인 방식으로 핵폐기물 관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영국 CoRWM이 이끈 핵폐기물 관리를 위한 사회적 공론화 방식은 영국 내에서 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영국 정부가 다시 핵발전소 신규 건설 방침을 밝히는 등 친핵발전 기조를 분명히 함에 따라 영국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에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이에 따라 CoRWM이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회적 공론화 활동의 빛도 다소 바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올 초 컴브리아 지역 의회가 영국 정부의 고준위 핵폐기장 부지조사 참여 제안을 부결시킨 것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발행일 : 20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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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