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2021. 4. 18. 15:21

* 이번 달부터 격월로 <책 소개> 코너를 홍덕화 충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함께 합니다. 홍덕화 교수는 탈핵·에너지전환운동에 힘을 보탤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원자력발전사회기술체제: 기술제도, 사회운동의공동구성』(한울,2019)을썼고, 기후정의와 에너지민주주의, 탈성장을 이정표 삼아 전환 경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

 

 

책 소개,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

 

느린 폭력으로 다시 보기

 

 

후쿠시마에서 체르노빌, 스리마일까지 기억해야 할 일들이 이어지는 봄이다.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과 30년 넘게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는 곳을 기억하는 것이 재난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적극적 행동이라는 점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다만 극적인 사건이 아닌 탓에 사회적 기억 속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일들을 어떻게 같이 소환해낼 것인지는 아직 과제로 남은 듯하다. 유례를 찾기 힘든 재난과 일상화된 방사선 피폭에 대한 사회적 관심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롭 닉슨은 '느린 폭력'의 시각에서 결과적으로 재난과 유사한 피해를 야기하지만 극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해 쉽게 묻히는 것들을 재조명한다. 그의 말을 빌자면, 느린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폭력, 시공을 넘어 널리 확산하는 시간 지체적 파괴,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이다.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롭 닉슨, 에코리브르, 2020)

 

방사선 피폭을 비롯해 기후변화, 생물종 다양성 손실, 유해화학물질 등 느린 폭력의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환경오염이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보이지 않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지적도 낯설지 않다. 다만 롭 닉슨은 이를 폭력의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환경오염의 정치적 성격을 부각시킨다.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라는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느린 폭력은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된다. 환경문제는 권력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느린 폭력은 환경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느린 폭력의 사례들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묵살되거나 해결이 지연되는 일이 다반사다.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불확실한 경우도 있지만, 가해자들이 근거의 불확실성을 문제삼으며 사회적 대응을 지체시킬 때도 많다. 이 경우 과학적 논쟁은 단순히 전문가들의 다툼이 아니라 느린 폭력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각축의 의미를 지닌다. '이주 없는 전치'의 문제도 눈여겨볼 만하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강제 이주만 폭력이 아니라 삶터를 지키며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된 것 자체가 느린 폭력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들어선 이래 긴 시간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이 이주 없는 전치의 생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잠시 이야기되었던, "내부 식민지"로 핵시설 입지 지역을 바라보는 것을 떠올려도 좋겠다.

 

볼거리와 자극적인 사건이 넘치는 시대인 만큼 느린 폭력을 보이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느린 폭력을 가시화할 수 있는 상징과 이미지, 서사가 중요하다. 그래서 롭 닉슨의 시선은 작가-활동가를 향해간다. 작가-활동가라고 해서 직업적 의미에서의 작가나 활동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적 작업을 통해 억눌려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 대항 역사(counter-history)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사람들, 다양한 매체와 수단을 활용해서 공동의 서사를 만들어 가는 이들이 이 시대의 작가-활동가이다. 굳이 이들에게 작가-활동가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까닭은 '느린 폭력'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이미지와 서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최근 탈핵운동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각자의 목소리를 담아 하나의 저항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작가-활동가들이 새롭게 고안해낸 이미지이자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낙관적인 전망으로 끝낼 일은 아니다. 저자가 누차 강조하듯이, 느린 폭력에 대한 이미지와 서사가 사회적인 반향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닌바, 저항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상징과 이미지, 서사를 되짚어보며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밀양 송전탑 투쟁과 울산 주민투표, 고준위핵폐기물 재공론화를 거치며 탈핵운동은 어떤 상징과 이미지, 서사를 만들었는가? 그렇게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는 탈핵운동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서사의 효과에 대해 묻는다. 더불어 탈핵운동이 빚어낸 사회적 기억의 공백을 파고든다. 손에 잡히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핵발전을 느린 폭력의 한 사례로 다룰 뿐이지만 핵발전과 탈핵운동을 다시 보기할 때 거쳐 가야 할 책이 아닐까 한다.

 

홍덕화 충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탈핵신문 2021년 4월(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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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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