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2021. 6. 17. 14:38

일본은 핵기술 개발에 앞서 있었던 서구 국가들에 비해 후발주자이면서도 기술 추격에 성공해 많은 수의 핵발전소를 건설했다. 핵발전소 건설과 운영에 있어서 폐쇄적인 이해관계자 집단이 존재하는 등 일본의 핵기술체계 형성 과정과 특징은 한국과 흡사한 점이 많다. 일본의 핵기술 개발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일본의 핵기술체계, 후쿠시마 핵사고에 대해 보다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의 탈핵을 위한 시사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글쓴이 주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 _ (1)

 

전시 일본의 핵무기 개발과 핵폭탄에 대한 동경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독일과 같은 서구 국가들에서 핵무기 개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일본도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이후 전시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일부 외교문서들이 공개되면서 핵 개발 역사의 일부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관련 연구도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핵무기 개발은 1940년대 초중반 서구 국가들에서 우라늄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 새로운 폭탄이 개발될 가능성에 주목한 군부의 지시로 이화학연구소와 교토대가 각각 ‘2호연구(二号研究)’‘F연구(F研究)’를 진행했다. 2호연구는 닐스 보어에게 지도를 받은 물리학자인 니시나 요시오가 이끌었고, F연구에는 후에 일본인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유카와 히데키가 합류하는 등 많은 과학자가 참여했다. 2호연구가 연구책임자의 성, F연구가 핵분열(fission)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지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두 연구는 다른 핵무기 개발이 진행되던 국가들과 같이 극비로 진행되었다. 두 연구를 통해 일본은 핵무기 개발에는 성공할 수 없었지만, 연구진들은 계산을 통해 핵무기의 파괴력이 당시의 화약무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음이 니시나 요시오의 회고를 통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라늄폭탄을 만들기 위해 상업용 핵반응로의 발전원리인 중성자의 속도를 낮춰 연쇄반응을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점 등은 일본이 핵폭탄을 완성할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일본의 핵무기 개발 연구는 서구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을 한데 모아 지혜를 쥐어짜냈던 맨해튼 계획에 비하면 극히 소규모였고, 투입할 수 있는 자본도 매우 적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많았고, 이화학연구소의 경우 국가가 지시한 핵무기 개발 연구는 함께 진행했던 사이클로트론 연구와 같은 기초연구를 지키기 위해 진행한 측면이 강했다. 핵무기 개발은 당시 일본 과학자들에게 절실하지 않은 연구였던 것이다. 아울러 전시 일본은 핵무기 개발을 지시하기는 했지만 연구를 지원할 물자도 부족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에 패전의 기색이 짙어졌던 것처럼 1945년 도쿄공습으로 인해 이화학연구소의 실험장치들이 소실되고, 우라늄 농축테스트도 실패하는 등 연구에 불리한 일만 일어났다. 이에 더해 애초에 일본은 우라늄을 구하기 힘들었고, 기술 기반도 약했으며, 2차대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해외의 과학자들과 정보 교류를 전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연구의 수준이 높아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결과적으로 1945년 여름까지 두 연구는 모두 실패로 종결되었다. 군부 측도 미국이 당분간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하여 전쟁에서 쓸 가능성은 없다고 낙관적으로 판단하며 연구의 실패에 개의치 않아 했다. 2개월 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 투하로 인한 패전 직후부터 1952년까지 미국 GHQ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의 모든 핵기술 연구는 금지되었고, 연구를 진행하던 기관들도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때 문부과학성이 관련 서류들을 소각 지시하는 등 은폐작업이 이루어진 탓에 당시를 설명하는 자료는 적은 상황이다. 2호연구의 분원이 있었던 오사카대학에서도 담당 학생이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우라늄 농축을 위한 분리통을 강에 버린 사례들도 패전 당시의 긴박했던 분위기를 말해준다.

 

 

우라늄광 채굴에 동원된 후쿠시마현 중학생들. 2호연구가 중단된 이후에도 마을에 정보가 전달되지 않아 이들은 패전일까지도 채굴을 계속하고 있었고, 자신들이 채굴하려고 한 것이 우라늄이었다는 사실을 패전 이후 한참이 지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 후쿠시마현 이시카와정립 역사민족자료관, 1945년 5월 15일 촬영)

 

연구가 종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86일과 8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우라늄폭탄 리틀보이와 플루토늄폭탄 팻맨은 각각 TNT 15킬로톤과 21킬로톤의 파괴력을 가지는 것이었으며, 강제동원으로 인해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포함한 약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핵폭탄 투하를 목도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지만 한편으로 핵폭탄과 핵기술에 대한 경외심과 기대, 동경이 확산되었다.

 

니시나 요시오는 그의 책 나와 원자력(原子力)에서 핵폭탄을 순물리학의 위대한 소산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파견을 통해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이 야기한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나온 발언이다. 또한, 핵폭탄이 강력한 기술력, 공업력, 경제력, 자산원을 가지는 대조직을 통해 완성된 것이라고도 했는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연구했던 일본의 과학자들에게는 미국의 자본과 자원 투입력에 대한 부러움도 있었을 터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일본에는 그 전에도 패전의 색이 짙었음에도 불구하고 핵폭탄으로 인해 미국과의 과학전에서 패했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과학기술 자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며 사용하는 주체에 따라 선용또는 악용이라는 방향이 정해진다고 보편적으로 인식했던 것도 핵기술 이용에 대한 기대 형성의 요인이 되었다. 아울러 당시 세계의 언론에서는 핵기술이 가진 잠재력, 민생이용에 대한 가능성을 보도했으며,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버섯구름은 일본인들의 인식에 거대 과학기술의 실현물로써 다가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폐허가 된 일본에서는 과학기술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민생용 핵기술, 평화를 위한 원자력은 그러한 과학기술의 중심이 되었다. ‘평화를 위한 원자력기술 개발은 기시 노부스케와 같은 정치인들에게는 핵무기 제조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행한 측면이 컸고, ·일 동맹 관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했다. 아울러 후쿠시마와 같은 가난한 시골 마을들에는 개발이라는 욕망의 토대 위에 핵발전소가 세워졌다. 60년 가까이 되는 기간에 국토에 50기가 넘는 핵발전소를 건설한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통해 평화를 위한 원자력위에 쌓았던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참고자료

山崎正勝(2011), 日本核開発:19391955原爆から原子力, 績文堂出版

山崎正勝(2001), “第二次世界大戦時日本原爆開発”, 日本物理学誌, 56(8): 584-590

産経新聞(2015), 原爆開発 科学者まれたつの出来事とは

原発史研究会(2018), 日本における原子力発電のあゆみとフクシマ, 晃洋書房

 

 

 

글쓴이: 최종민(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1년 6월(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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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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